내가 사는 집 앞에는 공원이라 하기에 나무는 조금 부족한 듯하나 널찍이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놀이터도 있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분수대도 있는 ‘호돌이 공원’이 있다. 지금 형태의 모습이 아닌 나의 첫 기억 속에 그 공원은, 그러니까 38년 전의 그곳은 당연하게도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훨씬 더 정돈되어 있지 않은, 바닥은 꽤 위험한 불규칙한 모양을 하고 있음에도 아이들은 축구를 즐겨 했고 나무 벤치는 농구 골대였으며 약간은 위험한 놀이터는 남자아이들의 무모한 허세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이 공원 이름의 유래는 많은 추측성 이야기가 있었지만 가장 유력한 후보는 1988년 10월에 입주한 이 아파트 단지가 서울올림픽이 개최한 해였기에, 또한 울퉁불퉁 깨끗하지 않은 바닥이 건물 위에서 보면 ‘호돌이’ 마스코트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어졌다 했다. 이 부분은 GPT를 통해 검색해 봐도 나오지 않는, 공식화되어 있지 않으나 오히려 그때는 그게 더 익숙하게 펴져 있는 유래였다. 이렇듯 아파트 입주와 동시에 이사를 온 나는 3~4살부터 살기 시작하여 이 공원의 변천사를 다 목도한 37년을 한집에서 살고 있는 ‘아파트키드’ 이자 이 동네의 산증인이 되었다.

#거리감
그러던 몇 년 전, 류준열 이란 이름을, 아니 정확히는 이름보다는 그의 사진 작업 중 둔촌주공아파트 시리즈의 일부였던 <부재의 아카이브>(2018-2020) 속 창백한 푸른색 아파트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은 계기가 있었다. 아마도 어느 기사에서였을까, 그의 작업이 ‘미래작가상’이라는 대학생들에게 주는 공모전 당선작이었고 몇 장의 둔촌주공아파트의 작업을 보며 기시감과 더불어 묘한 감정이 샘솟았다. 그때가 마침 내가 살던 아파트의 재건축 얘기가 스멀스멀 수면 위로 올라오던 시기였기에, 남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래된 구축 아파트에 거의 평생을 살아왔던 터라 자연스럽게 재건축 이슈는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직접적으로 그 단어가 들려오고 대치동의 ‘은마아파트’처럼 재건축이 된다는 말 이후로 40년 이상 흐를 거로 생각한다면 먼 미래의 이야기 같으나 점점 빠르게 재건축이 이뤄지는 반포, 용산, 동작 등 변화무쌍한 요즘 모습들을 보며 초조한 감정이 생기고 있었다. 경제적 이유를 제외하자면, 평생을 살았던 삶의 터전이었으며 주차 문제를 비롯하여 구축 아파트의 단점들을 가지고서라도 애정이 많은 곳이다. 지금의 모습이, 그리고 이 형태가 사라진다는 게 쉽사리 상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어땠을까? 어떠한 감정으로 이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을까?’ 처음 그의 작업을 보고 든 생각이다. 당시 많은 예술가가 둔촌주공아파트를 아카이빙을 하고 있었다. 사진 영상 글 그림 등 매체와 관계없이 1980년에 건설되어 5930세대의 대단지가 사라지는, 국내 최대의 아파트 단지가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록하고 싶어 했다. 특히나 그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그 속에 일원이었던 이들이 많은 감정을 품은 채 작업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는 했다. 사실 류준열이란 사람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진 작업에서는 꽤 정직하고 정갈한 기록물처럼 보이는 작업이었으며 섬세하고 꼼꼼하며 애정이 바탕이 되어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점은 그가 ‘둔촌주공아파트’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단지 옆 학교로 배정을 받으면서부터였으며, 학교를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 단지를 가로질러 가는 것, 그 인연이 그곳을 기록하게 만든 적당한 ‘거리감’이었다. 아파트와 우거진 숲의 조화가 흥미로워 시작한 기록이 이주가 끝난 후 남겨진 이미지들 속에서 부재에 대한 기념비가 되었다. 좀 더 직관적인 구성을 통해 그가 경험하지 못한 대상에 얽힌 이야기들을 보여주고자 함이 오히려 나의 마음을 더 와닿게 했다는 점이 ‘거리감’의 힘이었다. 류준열의 아파트 작업에서 처음 내가 느낀 기시감과 더불어 묘한 감정이 거기에서 기저한 것이었다. 내가 평생 살아온 나의 아파트 단지는 일종의 ‘거리감’이 없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는다. 혹은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가 더 맞는 표현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아직 제대로 된 사진 한 장조차 남겨 놓지 않은 작업자로서의 부채감, 이미 30여 년의 시간을 거쳐 변해버린 지금 단지의 모습을 보는 불편함, 더 이상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함까지 그 모든 복잡한 감정을 류준열의 ‘거리감’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작업에서 사진이라는 매체가,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그의 시선의 거리감이,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기록성
사진 작업의 대표적인 특징은 ‘기록성’에 근거한다. 2020년까지 ‘둔촌주공아파트’라는, 일종의 거리감을 가지고 기록한 시리즈를 지나 이제는 좀 더 본격적인 자신의 생활 터전과 밀접한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2003년 강동구로 이주한 작가의 가족은 총 8개의 거주지를 거쳤다고 말한다. 그 거주지역은 강동에서 하남까지 이어지는 아리수로 주변에 계속해서 머물게 되는데, 아리수로 양극단을 모두 경험하면서 도시의 흐름에 자신의 주거 궤적을 동기화해보고자 함이 새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지금의 전시《호롤롤로 사이트》는 그렇게 그의 동기화 중 인상 깊은 모멘텀이 된 ‘동양하루살이’가 소재가 된다. 2006년 여름, 강동구 암사종합시장에서 엄청난 동양하루살이 떼의 장면, 이때 한 할머니의 뉴스 인터뷰 도중 하루살이 떼를 묘사한 ‘홀롤롤로’라는 표현이 일종의 ‘밈’ 화가 되었고, 이는 남양주의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그리고 이 작업의 시리즈 제목이자 전시 제목이 되기도 하였다. 주로 강동, 하남 지역과 남양주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고는 했던 동양하루살이를 나는 몇 해 전, 잠실 운동장에서 목격했다. 야구를 관람하는 도중 저녁 시간이 되며 야구장 헤드라이트 앞으로 거대한 동양하루살이 떼(aka팅커벨)이라 불리던 장면을 보고 처음으로 어떤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저 빛 속을 향해 달려드는 조그마한 예쁜(?) 곤충일 거로 생각했던 나는 그 벌레떼의 양을 보고는 당시 뉴스에서 떠들썩하던 사회문제를 인식하였다. 하루살이는 인간을 공격할 수단이 없고, 인간은 하루살이를 멸종시킬 수 없기에 어느새 일방적인 싸움일 것 같았던 이 전쟁은 꽤 팽팽해져 있음을 알 수 있던 것이다. 마치 류준열은 이 팽팽한 줄다리기 가운데에 서 있는 중계진 같다고 생각했다. 그 어느 쪽의 우위를 점치지도, 그 어느 쪽의 페널티도 줄 수 없지만, 승패를 정하기보다는 연구와 사진의 기록성을 통해 현 상태를 전달해 주는 앵커이자 해설위원인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하루살이는 실제로 하루를 살아서라기보다 이들이 성충 단계에서 입이 퇴화해 먹지 못해 단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이들은 성충이 되기 전까지 몇 주에서 길게는 몇 년의 시간을 물속에서 보낸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하루살이의 존재를 인간의 분류상으로는 고시류(古翅類, Palaeoptera)에 속하는데 고시류란 ‘오래된 날개’라는 뜻으로 약 3억 년 전인 고생대 석탄기 후기쯤 지구상에 출연했다고 하니 인간이라 불리는 존재의 역사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존재임을 알 수 있다.1)
결국 이 지점에서 굉장한 아이러니함이 시작된다. 인간의 시대 이전부터 살았던 존재를 우리 인간은, 심지어 인간에게 직접적인 공격이나 피해를 주지 않는, 단명하는 존재를 불편하게 여겨져 기어코 죽여야만 하는, 대학살과 더불어 씨조차 말라버리기 위해 박멸에 최선을 다하는 군상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류준열은 이들의 사이에 놓여, 인간의 편도, 곤충의 편도 아닌 채 그들의 행태를 기록하며 전달하고 있다. 하루살이들은 깨끗한 물에서 번식하여 자란다. 깨끗한 물을 만들기 위해, 특히 한강을 기점으로 많은 영향력을 받는 서울 안에서 상수원 수중 정화 활동은 수년간 서울시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다. 결국 깨끗해진 한강의 물은, 하루살이를 급증하게 만든 원인이었으며 동시에 조개들의 무덤이 된 패총의 집결지가 되는 셈이다. 살아 있는 조개들은 수중 정화 활동을 위한 수중 쓰레기 더미와 함께 같이 죽어가고 있었다. 생명력이 강한 홍합과에 속하는 민물담치는 목재 철재 석재 등의 표면에 붙어 살아가거나, 상당수의 많은 조개들은 진흙이나 버려진 그물망 속에서 다수가 발견된다고 한다.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이 결국 애먼 생명력들을 앗아가는 건 아닐까? 이토록 열심히 최선을 다해 유영하는 날갯짓과 물속의 삶을 끝까지 추적하여 죽여야만 하는 삶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살아갈 것인지 그는 다양한 기록을 통해 일깨워 주고 있다.

# 추광성
인간과는 달리 가시광선 밖의 파장까지 감지할 수 있는 하루살이들은 LED보다는 수은등 같은 조명에 훨씬 이끌린다며, 하루살이를 빛으로 유인해 포획하는 끈끈이 보드가 트랩이 가동하는 5월이 되지 않아 끈끈이 없이 불만 켜진 보드에 하루살이들이 모여 있는 사진 <Phototaxis, 2024>를 가리키며 류준열은 말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곤충 채집이나 과학, 혼자 지긋이 바라볼 수 있는 대상에 관심이 많았어요.” 빛에 이끌리는 추광성의 성질을 이용해 하루살이들을 죽이거나, 더 많이 죽이기 위해 어떤 색깔에 더 반응하는지와 같은 실험을 하는 <Light Trap, 2024>와 같은 장면을 보며 그는 너무나도 가벼운 하루살이 같은 존재를 위해 인간들의 최선은 너무 무겁지 않나? 와 같은 문제의식을 느낀다고 했다. 자칫 무겁게만 접근할 것 같은 작가의 작업 주제에는 의외로 일상에서 넌지시 피-식 웃게 되는 아이러니함, 난센스(Nonsense)적인 측면이 그가 작업으로 이끌게 하는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시작한 작업이 크게는 욕망이 가시화되는 인간의 심리적 현상이나, 사회문제로까지 이어지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건축물로서의 흥미가 재개발의 아파트를 바라보는 사람, 살았던 사람들, 관찰자의 시점으로서 모두 조망하게 되는 연결고리가 되듯, 현재 류준열은 미약하기도 짝이 없는 하루살이 떼를 어떻게든 박멸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사실은 하루살이들의 생존을 돕게 하는 한강 물을 깨끗이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는 아이러니함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이는 앞으로 수면 위에 하루살이와 수면 아래의 조개가 한강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본질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그의 예술적이자 사회적 탐구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무엇보다 이미 그의 방식과 방법은 꽤 작가 자신의 방법론에 최적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사진의 기록성과 예술성, 현상을 바라보고 연구하는 자로서의 거리감까지, 마지막으로 그 과정을 모두 빛으로 환산한다면 그가 트랩에 걸리지 않은 채 유유히 그 빛을 따라가길 바란다.
1)작가의 스테이트먼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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